민주노동당 진보정치 443호(2009.10.26-11.1)

<한익수의 아메리카를 쏘다>

[펌] 오바마의 '의료개혁'전쟁 관전 포인트


미국에서 벌어지는 의료개혁을 둘러싼 공방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MB 의료민영화'가 슬금슬금 시동을 걸려는 시점에서 '오바마의 의료개혁'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과 시사점을 주는가? 다큐멘터리 '식코'를 통해서 미국 의료제도의 '엽기적인 실상'은 잘 알려져 있다. 'MB 의료민영화'는 결국 이를 따라 가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의료개혁 논쟁이 주는 교훈과 시사점은 ①의료 공공성이 파괴된 의료 민영화의 실상은 어떠한가 ②한번 시장만능주의에 의해 엉망이 된 제도를 개혁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③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제대로 서야 사회 공공성을 지키고, 살리는 구조적인 혁신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암보다 더 무서운 시장만능의 '의료민영화'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전국민의료보장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시장만능'이라는 '미국식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민간보험'이 모든 것을 해결해왔다.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보험'은 메디케어(65세이상 노인과 장애인 대상)와 메디케이드(극빈층 대상. 한국의 의료급여에 해당) 등 자격이 엄격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이에 따라 공공보험 수혜자는 미국 총 인구의 29%에 불과하다. 결국 절대 다수의 국민은 민간보험을 이용해야 한다. 민간보험의 연간 평균 보험료는 개인의 경우 4824달러, 가족보험은 1만3375달러에 달한다. '서민'에게는 턱없이 높은 액수이다. 이로 인해 전체 인구 3억148만명 중 15.4%에 해당하는 4634만명은 건강보험이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을 놓고 비교해 보면, 미국은 의료분야에서 '최고 비용, 최저 효과'의 '표본국가'다. 미국을 제외해야 제대로 된 평균치가 나올 정도다. 미국은 국내총생산(GDP)대비 국민 의료비지출이 16%에 달해 OECD국가 중 최고이며, 평균치인 8.9%에 두배 가량 높다. 연간 1인당 의료비지출로 보면 미국은 7290달러로 OECD 평균(2894달러)의 2.5배에 이른다. 반면 활동 의사수, 외래진료횟수, 병상보유수, 기대수명, 영아사망률은 23-26위의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최근 하버드 의대 연구진의 조사에 의하면 연간 4만5천명이 무보험으로 인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고 있다. 매 12분마다 한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셈이다. 또 개인 파산의 62%가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서 인데, 파산 신청자와 그 가족을 합하면 연간 2백만명이 이에 해당된다.

'사회 공공성'을 둘러싼 개혁과 반동의 싸움

지난 10월 13일 미 연방 상원 재무위에서 의료개혁 법안이 통과됐다. 상하 양원의 의원들은 이날 통과한 재무위 법안, 그리고 이미 심의를 거친 하원 상임위 공동법안과 상원 보건위 법안 등 3개의 법안을 조율, 합의안을 만들고, 이를 본회의에서 표결 처리한다.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올해 말까지 입법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당은 100명의 상원의원 중 60명, 435명의 하원의원 중 256명이라는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단독으로 입법을 밀어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항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10월 초 여론조사에 의하면 의료개혁에 대한 지지가 48%, 반대가 47%로 나타났다. 의료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의 최선봉은 공화당, 1300개에 달하는 민간보험업체의 협의체인 미국건강보험계획(AHIP), 그리고 보수언론 팍스TV등이다. 이들은 '괴담'수준의 언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의료개혁을 둘러싼 최대 쟁점은 '공공보험(Public Option)' 도입 여부다. 오바마 대통령과 민주당은 민간보험으로만 운영되는 '독점시장'에 공공보험을 신설, 서로 '공존'하며, '경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 현재의 민간보험보다 25-35%정도 싼 공공보험이 제공되면, 보험시장의 가격을 낮출 수 있고, 무보험자들도 보험가입이 쉬워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민간보험을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보완하겠다는 '반쪽짜리 개혁'이다.
민간보험업계는 이에 대해 "자유 시장경제체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발상", "공공보험은 민간보험을 내몰고, 사회주의 의료체제로 가는 '트로이 목마'"라고 비난한다. 의료와 건강을 '상품'이 아닌 '공공재'으로 인식, 전국민건강보험제도(NHI)나, 국가보건서비스제도(NHS)를 정착시킨 OECD의 거의 모든 나라가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일이다.
공화당이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것은 의료개혁 논란이 2010년 중간선거와 2012년 대선의 운명을 좌우할 '지지세력 굳히기'싸움이기 때문이다. 의료개혁을 좌초시킬 '복병'은 민주당 내부에도 있다. 상원 재무위의 법안에는 공공보험이 아닌 '비영리조합'의 설치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있으나 마나한 것으로 사실상 민간보험의 독점을 그대로 두겠다는 발상이다. 민주당내 보수파인 '블루 독'의 입장인데 하원의 경우 50명이 넘고 있다. 만약 상하 양원의 최종 법안에 공공보험의 설치를 삽입하면, 이들은 반란표를 던질 수도 있다.

무기력한 진보운동, 노동계급의 반성과 성찰

미국에서 전국민의료보장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처음 나온 것은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100여년 전의 일이다. 1904년 미국 사회당은 강령으로 전국민의료보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당과 같은 '진보정당'은 1917년을 깃점으로 급격히 세력을 잃고, 결국 100년의 긴 세월동안 의료개혁은 실현되지 않았다. 자유주의 개혁성향의 민주당도 몇 차례 공공보험의 도입을 시도했지만, 미국의사협회(AMA)의 강한 반대 속에 번번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미국내 진보정당의 취약이 전국민의료보장제도를 관철하는데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했다면, 미국 노동계급의 상층은 민간보험이라는 '의료 양극화의 독버섯'을 키우는데 일조를 한 '과오'가 있다.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와 그 전신인 미국노동총연맹(AFL)은 '기업복지'를 추구하는 '실용적 조합주의'에 매몰되어, 공공보험을 반대하거나, 도입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건강보험은 개별기업을 통해 확보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자본가와 노조는 '수당'의 한 항목으로 '민간보험료의 일정액 지불'에 합의했다. '노사화합'의 본보기였다.
결국 '조합 노동자'는 기업이 제공하는 민간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지만, '무노조' 상태의 저소득층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들은 무보험의 '의료사각지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또 인종으로 보면, 무보험자는 유색인종, 이민자에게 집중돼 있다. 백인은 무보험자가 10.8%인데 반해, 흑인은 19.1%, 아시안은 17.6%, 히스패닉(중남미계)은 30.7%를 차지하고 있다. 이주햇수가 짧은 '비시민권 이민자'는 44.7%가 무보험자다. 이처럼 미국의 의료문제는 그 내면에 계급과 인종간 격차가 깔려 있다. 그래서 근본적인 의료제도 혁신을 위해서는 '근로계층과 소수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존재가 더욱 아쉽기만 한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등장하며 의료개혁을 국정의 제 1과제로 내걸고 있는 것은 비단 무보험자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는 의료 민영화의 폐단이 국가 재정, 기업 자본가의 이윤, 중산층 보험가입자의 생계비를 휘청거리게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배계급은 자신의 목에까지 더러운 오물이 차 넘쳐오면 때늦게나마, 그리고 불충분한 내용이지만 보완책을 강구하기도 한다.
안타까운 점은 민주당내 진보개혁성향의 의원과 시민사회단체가 내놓은 '단일 지불자 형태의 전국민건강보험'법안이 유실되고 있는 점이다. 2009년 1월 89명의 민주당 의원이 연방 하원에 제출한 이 법안(H.R. 676)은 국가가 지불하는 공공보험을 모든 국민에게 도입하자는 내용이다. 단순화하면 현재의 메디케어를 전국민에게 제공하는 것과 유사하다. 의회에서 검토되는 3개 법안들과는 달리 이 법안이야 말로 구조적인 혁신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해당 상임위에서 심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한익수_ 미국 동부지역위 소속 당원으로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 94년까지 <한겨레>신문 시카고지사에서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후 재외동포 통일운동에 몸 담아왔다.